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문단 편집) == 일생 ==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주였으므로 성(城)에서 자랐다.[* 유럽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기사였으며 상비군 제도는 16~18세기에야 보편화되었다. 귀족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성을 지키며 살아간다.] 어릴 적부터 [[연극]] 대본 등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아서 1917년에 보쉬에 고등학교와 생루이 고등학교에서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1차 필기에 불합격했다. 그 후 파리에 있는 [[파리 보자르|에콜 데 보자르]]의 건축학과에 비학위과정 청강생으로 입학했으나 학업보다는 대학가 카페와 센 강변의 한 호텔방을 오가며 백수 생활을 즐겼다. 1921년 4월 프랑스 육군 이등병으로 징집되어 프랑스 육군 제2항공연대 항공정비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6월에 남불 이스트르에서 자비로 민간항공기 조종훈련을 1시간 20분 동안 받고 민간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22년 1월 육군 상등병으로 진급과 동시에 군용기 조종 면허장을 취득했다. 1922년 4월 파리에 있는 육군 사관후보생 EOS 과정에 입교, 예비군[* 우리나라의 예비군과는 다르고 우리나라의 상근예비역과 유사한 복무제도.] 소위로 임관했다. 1922년 8월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있는 육군 제37항공연대 배치되었으나, 프랑스 본토 근무를 희망하여 1922년 10월 프랑스 파리 르 부르제에 있는 육군 제34항공연대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말단 소위가 부임 2달 만에 근무지를 옮기는 것은 귀족 집안의 자제만 가능한 특별한 혜택이다.] 1923년 후일 유명 소설가, 시인, 언론인이 된 루이스 드 빌모린과 약혼했다. 이후 항공기 추락사고로 두개골이 골절되어 소위로 의병 전역했다. 프랑스 육군 항공의 선구자인 에두아르 바레스 장군의 권유에 따라 재입대를 할 계획이었지만 약혼녀와 가족들의 반대로 포기하고, 보알롱 타일제조회사의 제품 검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23년 9월 약혼녀와 파혼했다. 1924년 Allier and Creuse 트럭회사의 Saurer 자동차판매 대리점 영업사원으로 이직했으나 1년 6개월간 단지 1대의 트럭을 판매하고 일이 힘들어서 사직했다. 이후 몇몇 산문과 시를 집필하기 시작, 1926년 첫 저서인 <비행사(L'Aviateur)>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취업하여,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지배 하에 있었던 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와 현 [[세네갈]]의 [[다카르]]간의 정기 항공우편 조종사로 근무했다. 이듬해인 1927년에는 야간 항공우편 비행을 시작했으며, 불시착 항공기 수리 업무와 조난 비행사 구조 업무도 함께 병행했다. 같은 해 <남방 우편기(Courrier Sud)>를 집필하여 작가로 데뷔하였고, 3년 뒤인 1930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이를 출간했다. 그해 6월에는 <야간 비행(Vol de Nuit)>를 집필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월에 엔리케 고메스 카리요(Enrique Gómez Carrillo)라는 과테말라인 신문 기자의 미망인 콘수엘로 순신산도발 세세냐(Consuelo Suncín-Sandoval Zeceña)와 결혼하였고, 12월에 <야간 비행>으로 페미나 문학상을 받았다. 1935년 생텍쥐페리는 비행기 엔지니어와 함께 코드롱사(Société des avions Caudron)[* [[C.714]]를 만든 그 회사]에 의뢰해서 개인 전용기 'Caudron C.630 Simoun'를 주문하게 된다.[* 항공기 등록번호 '''F-ANRY'''. 'F-'는 프랑스의 국가코드, ANRY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이름 첫글자(AN)와 마지막 글자(RY)에서 따왔다.] 당해 11월 파리 - 사이공 구간의 비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장거리 비행시합 도중 기체결함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하여 5일 만에 구조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때 경험이 [[어린 왕자]]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 물론 애써 주문한 전용기도 부서졌다. 1938년 과테말라 상공에서 항공기 엔진 폭발로 불시착하여 두개골과 좌측 쇄골이 파열되는 사고가 있었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e0006522_5926657398bb3.jpg]] 참고로 친한 친구이던 앙리 기요메(Henri Guillaumet)도 남미 횡단 비행기를 몰다가 비행기가 추락했으나 놀랍게도 안데스 산맥 척박 산지에서 엿새 밤낮을 걸어와서 구조되었다.당시 생택쥐페리와 다른 친구들이 손수 비행기를 몰며 닷새 동안 안데스 곳곳을 수색해 찾지 못했는데 결국 기요메는 죽었구나!라고 포기했더니만 다음 날, 당당하게 스스로 걸어서 돌아온 기요메를 보고 다들 기겁했다고 한다. 이 일은 생택쥐페리가 쓴 책 <인간의 대지>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일을 다룬 책도 나왔으며 1995년에는 [[아이맥스]] 영화 사랑의 날개(Wings of Courage)로도 만들어졌으나 흥행과 평은 참패했다. 영화는 아이맥스 상영영화답게 40분으로 짧은 영화이다. 배급은 [[소니 픽처스]]. 이 영화에서도 생택쥐페리가 나오는데 바로 [[아마데우스(영화)|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연기한 [[톰 헐스]]가 맡았다. 여담으로 [[연인]], [[에너미 앳 더 게이트]]으로 알려진 장 자크 아노가 감독했으며 [[발 킬머]]도 나왔었다. 앙리 기요메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공군 조종사로 참전, 1940년 이탈리아군에게 격추당해 38세로 전사했다. 기요메의 죽음에 생택쥐페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39년 2월에 <인간의 대지>를 출판하여 그 해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앞둔 1939년 9월 3일 예비군 동원령으로 민항기 조종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대위 계급을 부여 받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Groupe de reconnaissance II/33e escadre de reconnaissance)에 동원 지정되어 공군 정찰기 조종사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1934년 프랑스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하는 바람에 육군 소위로 의병 전역했던 그는 공군 대위로 동원소집 되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5월 23일 [[https://en.wikipedia.org/wiki/Bloch_MB.170|블로흐 174]] 정찰기로 정찰비행 중 독일 전차부대를 발견한 직후 대공화기에 피격되었으나 무사히 귀환하여 정찰비행 사진을 제공했다. 1940년 6월 2일 이 일로 훈장을 받았다. 1년 뒤인 1940년 <성채(Citadelle)>의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어 다 완성하지 못하고 12월에 미국 망명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동원소집 중에 망명을 했으니 프랑스 군형법 및 병역법 위반이겠지만 당시 프랑스 파리가 나치에 의해 함락된 점, 자유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군인으로써의 의무를 마친 점을 생각한다면 무죄라 봐도 무방하다.] 그리하여 1개월 뒤인 1941년 1월 뉴욕에 도착하여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를 집필하였으며, 2년 뒤인 1943년 4월에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출간하였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생텍쥐페리를 일방적으로 정부 요직에 임명하고, 자유 프랑스 정부의 [[샤를 드골]] 장군은 생택쥐페리를 친독일 인사라고 공개적으로 암시하는 등 정치적인 색깔논쟁에 휘말린 생택쥐페리는 자유 프랑스군에 재입대 하기 위해 5월 4일 [[프랑스령 알제리]]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공군은 최신형 미제 항공기 조종사 연령을 만 35세 이하로 제한했는데, 당시 43세였던 그는 연령제한을 8년 초과한 데다, 잦은 추락사고로 인한 부상 후유증으로 비행복을 스스로 입을 수도 없었고, 왼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서 후방의 적항공기를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조종사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유명인사로 자유 프랑스군 사령부 고위 장교들과 친분이 있었던 그는 예비군 공군 소령 계급을 달고, 조종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다만, 매우 정교한 미제 최첨단 고성능 장거리 정찰기인 [[P-38 라이트닝|F-5B-1-LO 라이트닝]] 정찰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7주간의 기종전환 훈련을 받아야 했다. 1943년 7월 21일 튀니지 부근의 라 마르사 기지에 위치한 미 제7군 소속 자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에 배치되었다.[* 소속 부대인 비행대장과 동일한 계급에 이미 유명인이었던 그는 군 생활을 제멋대로 해서 물의를 일으켰지만 비행대의 장병들은 그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2번째 출격 후 착륙하는 과정에서 조종 미숙으로 항공기를 고장내는 바람에 비행대장은 그를 비행 부적합자로 분류하여, 지상근무를 명령하였다. 이후 8달에 걸친 지루한 지상근무를 견디다 못한 그는 개인적으로 지중해 지역 연합공군사령관 아이라 C. 이커(Ira C. Eaker) 미 육군 중장을 만나 비행을 할 수 있도록 청탁을 넣어, 1944년 5월 16일, 사르데뉴 섬의 알게로 기지에서 비행대로 복귀하였다. 비행대로 복귀한 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평소 취미였던 조종 중 독서와 조종 중 글쓰기를 재개했다. 전쟁 중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완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어서 전시에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건 문학이었고, 군 복무는 둘째였다. 그는 비행에 필수적인 절차인 비행 전 점검이나 엔진 예열 등의 필수 점검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혼자 독서를 했다. 한 번은 정찰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데, 비행 중 읽던 소설책을 다 읽지 못해 지상 병력이 그의 착륙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기지 상공을 1시간 동안 빙빙 선회하며 소설책을 다 읽은 다음에 착륙을 하기도 했다. 그는 친독일이냐 반독일이냐 하는 정치적 색깔 논쟁에 휘말려 우울증이 왔고, 이 때문에 전쟁 중 술을 마시기 시작해 폭음을 하곤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 상태를 악화일로에 있었다. 1944년 6월 29일에는 출격 순서가 아님에도 자신이 잘 아는 사부아 지역에 대한 정찰이라는 이유를 들어 비행을 지원했고, 안시 상공에서 엔진 고장이 일어나 실수로 방향을 잘못잡아 적 점령지인 이탈리아 제노아 상공에 진입하여 격추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1944년 7월 17일 그의 비행대는 코르시카 바스티아 인근 보르고(Borgo)로 기지를 이동하여, 8월 15일로 예정된 남프랑스 상륙작전([[용기병 작전]])을 위한 상륙지역 지도제작용 항공사진 촬영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운명의 7월 31일 오전 8시 25분 그는 일상적인 정찰비행을 위해 비무장으로 6시간 분의 연료를 탑재한 정찰기를 몰고 이륙했으나 6시간이 지나도록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고, 이륙 8시간 30분 뒤 실종 보고가 들어왔다. 그를 존경하는 부대원들은 그가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진 것에 놀랐다. 그의 실종 소식은 국제뉴스에 헤드라인으로 올라갔다. 정찰기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인근에 추락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시 상황이라 추락지역에 대한 조사나 사고원인은 조사되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실종처리가 되었으나 사망으로 추정되어 1948년 전쟁 중 사망으로 인정되었다. 비행에 대한 일화만 보면 공사를 혼동하는 군대에는 있어선 안 되는 사람이지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자신의 로망을 추구한 건 이래저래 대단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